기억의 욕심 :: 2008/06/02 14:35
그곳의 바람은 금새 쌀쌀해졌던 기억이 난다.
새로 구입한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어찌나 내 얘기 같은지,
한곡을 연신 돌려 듣고는 눈물을 훔쳐냈던 기억도 난다.
머리를 묶어봤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조리 잘라내었던 머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지저분히 남겨진 마음처럼 자라고 또 자란다.
그러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한뼘 만큼 자르고 나면, 마음도 그만큼씩 함께 잘려나가는 기분이었다.
이직을 결심한 계기 또한,
그렇게 자라버린 머릿카락 만큼이나 어처구니 없이 반복적이었다.
애꿎은 전화기 탓, 앉아 있는 자리 탓,
나는 그저 잘 하고 있었는데 모든게 나를 둘러싼 모든것들 때문이다- 라고 원망하였다.
성녀에게 붙은 부정한 지푸래기라도 되는 것처럼,
지금 내가 걸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처럼 말이다.
그렇게 어거지로 한가지씩 버려대기 시작했다.
심지어 나를 걱정하던 사람들까지도.
그 위로의 눈길이 나를 점점더 옭아매고 나약하게 하는 거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했다.
그리고 모든 것으로부터,
정확히 차단되었다.
아직도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거슬린다. 귀뒤가 묵직하도록 걸어낸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나는 결국 제풀에 꺾여, 쓰러지고 말았다.
우물안에 갇혀있다가 세상밖으로 튀어오른 개구리처럼,
사방팔방을 펄쩍 거리고 뛰어다니다가 쉬이 지쳐버렸다.
새로 산 전화기에도 우연찮게 같은 전화번호가 찍혔다.
그야말로 내가 원하지 않았던 사소한 순간으로 인해, 다시 부정적인 물건이 되었다.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이,
오히려 너무 심하게 지쳐 쓰러져버렸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이,
재생 능력을 잃었다.
새삼스럽게 머리를 묶다가 옛 생각이 났다.
내가 등을 돌렸던 그녀와 갑자기 나눈 어젯밤 대화가 나를 그 속으로 끌어드렸는지,
잘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나는 그때의 나에게 얼음물 한사발을 끼얹은 듯한 몰골인 듯 하다.
삭히지 못했고, 삭힐 방법을 찾지도 못하는 내가,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말도 안되는 것들에 원망을 쏟아붓던 그때가 떠올라 버렸다.
이제 자르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여전히 뭔가 어색하다.
누가 들으면 웃길지도 모르나, 나는 그 머리카락 한가닥 한가닥에도 내 기억세포가 있는 듯 했다.
그래서 어서 빨리 잘라내버려야 했고, 털어내야 했었다.
내 몸 어느 구석에, 어느 한톨도 남기지 말고 깨끗하게 말이다.
어젯밤 전화기에 흐르던 음악이 있었다.
뜻밖에 들려오던 음악소리에 울컥 눈물이 나왔다.
지직 거리는 좋지 않은 수화음인데도, 누가 직접 불러주는 것이 아닌데도,
행복하여, 눈물이 났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가,
곧 슬퍼졌다.
언젠가 그리 되겠지. 라고 믿지 못할 약속을 한다. 스스로에게.
그가 보내온 꽃 바구니의 꽃들이 다 말라 이제는 정리를 했다.
걔중 마르지 않은 카네이션 몇송이를 꺼내 작은 바구니로 옮겨 꽂아두었다.
그렇게 되고 싶다고 말했다. 조심스럽게. 들리지 않은 목소리로.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오랫도록 남아줄 수 있는 카네이션이었으면 좋겠다고.
언젠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모두 다 말하지 못한 내 많은 이야기들까지도.... 아우성친다.